“정밀한 테크닉, 오차 없는 K팝 춤…BTS는 현대무용가”

2022-08-17 13:12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정규 4집 수록곡 '블랙 스완'(Black Swan) 뮤직비디오. [빅히트뮤직 제공] 연합뉴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맨발의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사선으로 무대에 섰다. 단정하고 깔끔한 상반신 안무를 하는 대열 앞으로, 지민의 춤이 시작된다. 긴 팔을 쭉 뻗은 뒤 이어지는 빠르고 시원시원한 상하체 동작은 현대무용수와 다름 없다. 지민이 바닥을 뛰어오르고 구르고 회전할 때, 여섯 멤버는 우아한 몸짓을 한치의 오차 없이 선보인다. 바닥에서 떨어진 맨발의 높이와 각도마저 일치한다. 2020년 공개된 ‘블랙스완’ 뮤직비디오에서다. ‘맨발의 춤’은 사실 위험하다. “바닥과의 마찰로 인해 미세한 밸런스 차이를 직감적으로 느껴 중심을 잃기 쉽고, 발가락 하나의 실수까지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보들에겐 금물이다.

“방탄소년단은 두려움 없이 다양한 안무 스타일을 선보인 K팝 그룹이에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안무에는 예술과 창작의 고통을 담아낸 현대무용수라고 볼 수 있어요.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K팝 댄스는 이제 하나의 장르라고 봐야 해요.”

K팝이 영미 주류 음악 시장을 ‘침공’한 지난 10년 사이, 세계 무용계가 놀랄 만한 ‘사건’이 등장했다. 무용 역사상 유례없는 ‘댄스 팬덤’이 21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오주연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교수는 “러시아 하면 발레, 라틴 하면 탱고가 떠오르듯이, 지금 한국 하면 K팝 댄스를 떠올린다”며 “나라 이름과 춤의 장르를 성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등 2010년대 2세대 K팝 그룹을 기점으로 나타난 기이한 ‘K팝 댄스’ 현상을 오 교수가 분석했다. K팝이 세계인의 장르가 된 이후 음악이 아닌 춤에 대한 분석과 이론 정립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미 최초의 한국인 무용이론 종신교수인 오주연 교수가 지난달 출간한 ‘K팝 댄스(K-pop Dance: Fandoming Yourself on Social Media)’는 이미 아마존 대중무용 분야 신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가 됐다. 현재 일본어 중국어 번역판 출시를 계획 중이다.

오주연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 교수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K팝 춤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학술서를 발간했다. 그는 “정밀한 테크닉, 오차 없는 K팝 춤은 오랜 훈련과 노력의 결과로 K팝 가수 한 명 한 명을 무용수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 ‘K팝 댄스는 SNS 시대의 춤’…복잡·정교·고난도 테크닉

“K팝 댄스에는 현대무용을 비롯해 한국무용, 발레, 보깅 등 굉장히 많은 춤의 뿌리가 보여요. 순수예술 장르에서 파생된 것이라 볼 수 있어요.”

선화예중고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순수 무용학도인 오 교수가 보는 K팝 춤에는 우리만의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수년에 걸쳐 1980~2022년까지 K팝 댄스의 진화를 분석하고, ‘K팝 댄스’의 특징과 팬덤 현상을 연구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의 춤은 1980년대 박남정 김완선에서 시작된 방송댄스, 1990년대 댄스음악신을 주도한 이태원 문나이트 클럽의 계보를 지나 1990년대 후반 1세대 아이돌이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다른 길로 접어든다. 오 교수는 “H.O.T, SES가 등장하며 안무가 정착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완선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에도 포인트 안무는 있지만, 즉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거나 즉흥을 겸했어요. 그런데 1세대 아이돌 시대가 오면서 매번 같은 안무를 추게 됐어요. 연습생들은 과거 방송국 무용단이 해온 백업 댄서 역할을 하고, 이후 K팝 그룹으로 데뷔를 하고요. 마치 무용단에서 군무를 하다 솔리스트(솔로 무용수)로 승급하는 형식처럼요.”

2010년대 이후 ‘춤 문화’를 바꾼 K팝 댄스의 성장과 진화엔 SNS가 큰 역할을 했다. ‘K팝 댄스는 SNS 시대의 춤’이다. 오 교수는 “댄스 클럽에서 손을 맞잡고 왈츠를 추는 등 사교댄스의 역할을 했던 춤이 TV에서 영화로, SNS로 옮겨왔다”며 “플랫폼의 차이가 K팝 안무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트와이스 나연의 ‘팝!(Pop!)’에선 손 동작을 이용한 제스처형 안무로 각종 챌린지 열풍이 일었다. 이 안무는 일명 ‘치매예방’ 춤으로도 화제가 됐다. [‘팝!(Pop!)’뮤직비디오 캡처]

‘직관’해야 볼 수 있던 ‘커다란 무대’와 SNS에서의 춤은 확연히 다르다.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 15초 짜리의 짧은 영상으로 담을 수 있는 춤으로 발전해나갔다. 오 교수는 “한 평 짜리 공간에서 추는 춤은 짧아지고, 빨라졌다”며 “다리를 안 써도 되는 춤인 반면 상체의 동작이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해졌다”고 말했다. 최근 ‘걸스(Girls)’ 앨범으로 돌아온 에스파, 트와이스 나연의 ‘팝!(Pop!)’에 담긴 ‘제스처형 포인트 안무’(gestural point choreography)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포인트 안무가 틱톡 챌린지로 이어진다. 나연의 복잡한 손동작은 일명 ‘치매 예방’ 춤으로 인기를 모았다.

“화면이 작으니 각도를 착착 감기며 춤이 진행되는데, 틱톡 스타일의 ‘소셜 미디어 댄스’(social media dance)와 K팝 안무가 비슷해지는 측면이 있어요. K팝이 그 트렌드를 잘 반영한 거죠.”

블랙핑크 '더 쇼' [YG엔터테인먼트 제공]

뿐만 아니라 3세대 K팝 그룹인 블랙핑크 이후 K팝 춤은 ‘고난도 테크닉’을 요한다는 특징이 있다. 블랙핑크의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의 경우 “‘하나 둘 셋’이라는 가사에 맞춰 손가락, 팔 모양, 골반 위치를 3초 안에 바꾼다”고 오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춤이 굉장히 빠르게 진화했다”며 “K팝의 테크닉은 정밀하게 쪼개진 세밀한 동작을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추느냐에 있다”고 봤다. 실제로 K팝 팬덤은 K팝의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로 ‘오차없는 칼군무’와 ‘테크닉’을 꼽는다.

“K팝이 선호하는 미학이 점차 인공미에 닿아있고, 그것이 자본을 끌어들이는 포인트가 되기도 해요. AI 인플루언서와 가수가 등장하는 것처럼 이젠 사람과 인공의 경계가 옅어진다고 보여져요. 안무에서도 기계처럼 추는 미학이 반영되고 있고요.”

K팝 커버댄스는 한류 확장의 주요 콘텐츠로 자리하고 있다. K팝 팬들은 단지 영상을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한다. 에이티즈의 남미 지역 팬들은 ‘에스파냐 갓탤런트’에까지 출연해 그룹의 커버댄스를 선보였다. [에스파냐 갓 탤런트 캡처]

■ 무용 역사상 전무후무한 댄스 팬덤…“K팝, 춤 민주화의 주역”

흥미로운 것은 이 고난도 춤을 열심히 따라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따르면 ‘커버 댄스’는 한류를 성장케 한 중요한 요소이자, 전 세계의 K팝 동호회의 가장 활발한 활동 중 하나다.

오 교수는 “춤은 따라 추는 사람이 있어야 파급이 된다”며 “따라 추지 않고 보기만 하면 박물관에 전시되는 기록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무성 영화 시대에 왈츠가 유행하고, 발레가 세대를 넘나들며 팬덤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다. K팝 커버 댄스는 단지 춤만 추지 않는다. K팝 그룹의 의상, 헤어, 노래까지 똑같이 복사한다. “닮고 싶은 욕망은 댄스 팬덤의 중요한 동기”이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 [빅히트뮤직]

“커버댄스는 어떤 한 춤을 장르로 정립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단계예요. 역사적으로도 이 단계를 거친 춤은 몇 가지 없을 뿐더러, 이렇게 거대한 댄스 팬덤이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기에 K팝 댄스는 장르로 봐야 해요. 대중문화냐 순수예술이냐의 논의를 떠나 한국에서 나온 한국 역사의 한 자리를 매김하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보고 있어요.”

K팝의 성장을 이끈 가요기획사도 ‘춤의 장벽’을 낮춘다. 오 교수는 “K팝이 흥미로운 점은 대놓고 따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인기 K팝 그룹은 안무영상을 공개한다. 블랙핑크의 ‘하우 유 라이크 댓’ 안무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12억회를 기록 중이며, 이를 커버한 춤 영상이 숱하게 올라오고 있다.

“무용의 역사에서 춤은 저작권이자 개인의 발명품이니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데에 반해 K팝은 춤을 민주화한 주역이에요. K팝의 전 세계 댄스 팬덤은 SNS로 소통하는 시대에 춤이 가진 저작권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줘요.”

방탄소년단 ‘다이너마이트’ 안무영상 캡처[방탄소년단 안무영상 캡처]

■ 시스템이 구축한 K팝 춤…‘영재교육의 결과’이자 ‘사람의 역사’

K팝 춤이 전 세계 어느 장르의 춤과 구분되는 가장 독특한 특징은 “K팝 시스템 안에서 성장했다”는 점에 있다. 오랜 연습생 기간, 혹독한 훈련, 완벽에 가까운 무대는 K팝 춤의 독창성을 만든다.

‘오차없이 완벽한’ K팝 춤은 처절한 ‘노력의 산물’이다. 오 교수는 “K팝 그룹이 장르를 초월해 완성한 춤은 엄청난 반복과 오랜 훈련을 거친 영재교육의 결과물”이라며 “이토록 어린시절부터 혹독하게 연습하는 춤 장르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의 고난과 단련의 시간을 통해 K팝 댄스는 완성됐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진화했다. 이 흐름 안에서 1990년대 등장, K팝을 이끄는 4대 기획사 중 하나로 자리한 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프로듀서 박진영은 K팝 댄스 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 원더걸스, 2PM, 트와이스, 잇지(ITZY)에 이르기까지 박진영은 그 자신과 제자(?)들을 통해 K팝 댄스의 흐름과 시스템을 보여주는 집약체이기도 하다.

박진영과 비.

오 교수는 “박진영은 여전히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K팝 춤의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봤다. 비와 함께 한 ‘나로 바꾸자’, 선미와 함께 한 ‘웬 위 디스코(When We Disco)’는 사제 관계와 K팝 댄스의 긴 흐름을 보여준다. 이는 K팝 댄스가 단지 아이돌에 머무르는 “짧은 수명의 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다. 오 교수는 “K팝 댄스에서 아이돌 춤은 빙산의 일각이고, 굉장히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다 함께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K팝은 한 장르 안에 소위 1~4세대에 이르는 다양한 그룹이 공존하고, 체계를 갖춘 장르로 나아가고 있다. 비나 빅뱅, 방탄소년단의 안무는 ‘데뷔조’ 연습생이나 신인 그룹이 보여줘야 하는 ‘퍼포먼스 통과의례’가 됐다. 오 교수는 “춤은 레퍼토리가 있어야 장르가 되는데, K팝은 댄스 열풍이 쌓이고 반복해 레퍼토리로 고착됐다”고 봤다. 그러면서 “박진영을 비롯해 빅뱅, 소녀시대 등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K팝이 젊음의 장르가 아닌 댄스로서 체계가 탄탄하게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K팝과 K팝 춤은 한국의 국경과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외국인 멤버로만 구성된 K팝 그룹이 등장하고,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K팝 커버댄스를 춘다. 오 교수는 “K팝 댄스는 비민족화가 되고 있다”며 “K팝 댄스에서 K는 한국,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일컫는 용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안엔 우리의 역사가 담겨있다.

“춤의 역사는 사람들의 역사예요. 춤은 한 명의 무용수가 몇 년에 걸쳐 피나는 연습을 해야만 ‘태’가 나와요. 그 태가 나오려면 정말 오랜 시간 춤을 춰야 하죠. K팝 댄스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사람들의 역사예요. 1980년대부터 2022년까지 살아온 한국사람들의 역사이자, K팝 안무를 만든 예술가들의 역사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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